2022.09.29 - [마음공부] - 부처님의 생애 / 제3장.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 (4) .. 성도 후 49일 & 범천의 권청
부처님의 생애 / 제3장.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 (4) .. 성도 후 49일 & 범천의 권청
2022.09.28 - [마음공부] - 부처님의 생애 / 제3장.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 (3) .. 깨달음 & 천인들의 축복 부처님의 생애 / 제3장.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 (3) .. 깨달음 & 천인들의 축복 2022.09.28 - [마음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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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생애
제4장. 전법의 길
와라나시로 가는 길
‘누구에게 먼저 이 진리를 설해야 할까?
누가 재빨리 믿고 받아들여 이해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예전의 스승이었던 알라라깔라마를 떠올렸다.
‘알라라깔라마는 현명하고 지혜로우며 오랜 세월 청정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진실한 수행자 알라라깔라마라면 나의 깨달음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그 때 천인이 다가와 일러주었다.
“세존이시여, 알라라깔라마는 칠 일 전에 죽었습니다.”
천인의 귀뜸에 따라 하늘의 눈으로 살펴본 부처님은 그가 칠 일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부처님은 다시 생각하였다.
‘웃다까라마뿟따는 식견이 풍부하고 총명한 사람이다.
웃다까라마뿟따라면 나의 가르침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그 때 또 천인이 다가왔다.
“세존이시여, 웃다까라마뿟따는 어젯밤에 죽었습니다.”
역시 하늘의 눈으로 살펴본 부처님은 웃다까라마뿟다가 전날 밤에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험난한 수행의 길을 함께 걸은 다섯 수행자는 오랜 세월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들에게 제일 먼저 법을 설하리라. 다섯 수행자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부처님은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는 신통한 하늘의 눈으로 다섯 수행자가 있는 곳을 살폈다.
그들은 와라나시의 선인들이 머무는 사슴동산에서 여전히 고행하고 있었다.
“와라나시 녹야원으로 가리라.”
드디어 부처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큰 고통과 아픔을 이겨냈던 땅 우루웰라,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과 해탈의 기쁨을 가져다준 그곳을 떠나 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야를 지날 무렵이었다.
맞은편에서 한 수행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초췌한 얼굴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는 아지위까 교도우빠까였다.
걸음을 멈추고 휘둥그런 눈길로 바라보던 우빠까가 물었다.
“당신의 모습은 맑고 얼굴은 환히 빛납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 모든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나는 무엇에도 더럽혀지지 않고 모든 욕심과 애착에서 해탈한 사람입니다.”
“당신의 스승은 누굽니까, 당신은 어떤 법을 배웠습니까?”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는데 누구를 가르켜 스승이라 하겠습니까?
나에게는 스승이 없습니다. 또한 나와 같은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곧 성자요 최고의 스승이니, 홀로 깨달음을 얻은 나는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던 우빠까가 다시 물었다.
“그럼,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진리의 왕국을 세우고자 와라나시로 가는 길입니다.
그 곳에서 어두운 세상에 진리의 북을 울릴 것입니다.”
“최고의 승리자라도 된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벗이여, 나에게 번뇌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나와 같은 승리자는 세상에 없습니다.
나는 모든 사악한 세력에 대항하여 승리하였습니다.
벗이여, 내가 바로 승리자입니다.”
우빠까는 입을 삐죽거렸다.
“흠,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한 안타까운 인연이었다.
부처님은 가야에서 서북쪽 로히따왓뚜, 아날라, 사라티뿌라를 지나 강기슭에 다다랐다.
강은 깊고 넓었다.
“강을 건네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초라한 옷차림을 한참이나 훑어보던 뱃사공이 말하였다.
“뱃삯만 준다면 얼마든지 건네 드리지요.”
“저는 가진 돈이 없습니다.”
“뱃삯이 없다면 태워줄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눈 깜짝할 사이에 허공을 날아 반대편 강기슭으로 건너갔다.
깜짝 놀란 뱃사공은 기절하고 말았다.
강을 건너 옷감과 향료의 도시, 고색의 창연한 바라문들의 도시,
와라나강과 아시강이 에워싼 와라나시로 들어섰다.
제자를 찾는 고단하고 먼 길이었다.
녹야원의 다섯 수행자
“저기 오는 이는 고따마 아닌가?”
멀리서 부처님의 모습을 본 다섯 수행자는 고개를 돌리며 서로 다짐하였다.
“맛있는 음식을 탐한 고따마는 타락자다.
신성한 고행을 버린 저 수행자에게 우리가 뭘 기대하겠는가?
저런 수행자는 일어나 맞이할 필요도 없고, 예배하고 공경할 필요도 없다.
여기로 오건 말건 자리를 펴건 말건 상관 말자.”
그런데 맑고 환한 얼굴빛과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금빛 광채에서 다섯 수행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처님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들은 불붙은 조롱 속에 갇힌 새처럼 안절부절 못하였다.
다섯 수행자는 각각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발우를 받아들고,
앉을 자리를 준비하고, 발 씻을 물을 가져오며 반갑게 맞이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고따마. 먼 길에 얼마나 고행이 많았습니까?
벗이여, 이 자리에 편히 앉으십시오.”
“그대들은 여래(如來)를 고따마라 불러서는 안 된다.
완전히 깨달은 부처님을 벗이라 불러서는 안 된다.”
다섯 수행자는 믿을 수 없었다.
“고따마, 당신은 지독한 고행을 했지만 선인의 법을 얻지 못했습니다.
마을로 나가 공양이나 받는 둥 타락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타락하지도 않았고, 선정을 잃지도 않았다.
나는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었고 불사(不死)를 성취했다.”
다섯 수행자는 말이 없었다. 부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내가 거짓말을 하거나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걸 본 적 있는가?
그대들은 나의 얼굴이 지금처럼 빛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누구보다 진실한 삶을 살아온 분이라는 걸 잘 아는 그들이었다.
다섯 수행자는 부처님의 위엄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
오랜 침묵이 흐른 뒤 저녁이 찾아왔다.
그들의 눈빛에 조금씩 믿음의 등불이 타올랐다.
보름달이 하늘 한 가운데서 온 세상을 환히 비출 때였다.
부처님은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시작하였다.
“수행자들이여, 귀 기울여 들어라.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면 머지않아 그대들도 출가한 목적을 완수할 것이다.
수행자들이여,세상에 두 가지 극단이 있다.
수행자는 그 어느 쪽에도 기울어서는 안 된다.
두 가지 극단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욕망이 이끄는대로 관능의 쾌락에 빠지는 것이다.
그것은 천박하고 저속하며 어리석고 무익하다.
또 하나는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데 열중하는 것이다.
그것은 피로와 고통만 남길 뿐 아무런 이익이 없다.
수행자들이여, 이 두가지 극단을 떠난 중도(中道)가 있다.
그것은 눈을 밝게 하고, 지혜를 증진시키며, 번뇌를 쉬고 고요하게 한다.
신통을 이루며, 평등한 깨달음을 얻어 미묘한 열반에 이르게 한다.
수행자들이여,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지혜롭고 성스러운 팔정도(八正道)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維).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바로 그 길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끝없이 이어졌고, 다섯 수행자의 가슴은 환희로 넘쳐났다.
“수행자들이여,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있다.
그것은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발생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태어남은 괴로움이고, 늙음도 괴로움이며, 질병도 괴로움이고, 죽음도 괴로움이다.
미운 사람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요,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오온(五蘊)에 대한 집착은 괴로움이다.
괴로움의 발생이란 무엇인가? 온갖 괴로움은 원인에 의해 생겨난다.
끊임없이 윤회하며 온갖 괴로움을 받게 되는 원인은 바로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욕망이다.
감각적인 욕망과 생존하려는 욕망과 죽음에 대한 욕망이다.
괴로움의 소멸이란 무엇인가? 그릇된 욕망을 남김없이 없애고 단념하고 내던지고 해탈하여 집착이 없는 것을 말한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팔정도이다.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일찍이 누구도 가르친 적 없는 법이니 바르게 사유해야 한다. 그러면 눈. 지혜. 밝음. 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나는 알아차렸다.
‘이것이 괴로움임을 완전히 알아야만 한다’라고 나는 알아차렸다.
‘이것이 괴로움임을 완전히 알았다’라고 나는 알아차렸다.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나는 알아차렸다.
‘괴로움의 발생은 끊어 없애야만 한다’라고 나는 알아차렸다.
‘괴로움의 발생을 완전히 끊어 없앴다’라고 나는 알아차렸다.
‘괴로움의 소멸을 똑똑히 보아야만 한다’라고 나는 알아차렸다.
‘괴로움의 소멸을 이미 똑똑히 보았다’라고 나는 알아차렸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나는 알아차렸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닦아야만 한다’라고 나는 알아차렸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완전히 닦았다’라고 나는 알아차렸다.
수행자들이여, 이것은 일찍이 누구도 가르친 적 없는 법이니 바르게 사유해야 한다.
그러면 눈. 지혜. 밝음. 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끝없이 이어졌다.
“수행자들이여, 내가 만약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각각
세 차례씩 열두 가지양상(三轉十二行相)으로 바르게 사실 그대로 완벽하게 알고 보지 못했다면
나는 모든 하늘의 신들과 인간들 가운데서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선언하지 못했을 것이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각각 세 차례씩 열두 가지 양상으로 바르게 사실 그대로 완벽하게 알고 보았기 때문에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고, 해탈하여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그때였다.
꼰단냐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진리를 보는 눈이 맑고 깨끗하게 열린 것이었다.
“아! 알았습니다.”
꼰다냐의 탄성에 부처님이 조심스레 물으셨다.
“법을 알겠는가?”
“알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정말 법을 알겠는가?”
“알았습니다. 선서(善逝)시여.”
대지가 진동하고 끝없는 광명이 비쳤다.
천인들이 기쁨의 함성을 터트렸다.
부처님 역시 기쁨을 감추지 않으셨다.
“꼰단냐가 깨달았다. 안냐따꼰단냐.”
부처님의 발아래 꼰단냐가 머리를 조아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세존께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오라, 비구여. 나의 가르침 안에서 청정한 범행을 닦아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도록 하라.”
진리에 먼저 눈을 뜬 꼰단냐는 동료들을 위해 마을을 드나들며 여섯 사람이 먹을 음식을 얻어왔다.
네 수행자를 위한 부처님의 설법은 밤낮없이 계속되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성된 것이다.
생성된 모든 것은 소멸하는 법이다.”
“저도 알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도 알았습니다. 선서시여.”
왑빠와 밧디야가 연이어 탄성을 터트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도 세존께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오라, 비구여.”
이제는 꼰단냐와 왑빠와 밧디야가 음식을 얻어왔고,
나머지 두 수행자를 위해 설법하셨다.
같은 질문에도 부처님은 조금도 싫증 내지 않으며, 또 다시 설명하셨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성된 것이다.
생성된 모든 것은 소멸하는 법이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묻고 또 묻던 마하나마와 앗사지마저 소리쳤다.
“저희도 알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도 세존께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오라, 비구여.”
부처님께서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물질(色 )은 ‘나(我)’가 아니다.
만약 물질이 영원불변한 ‘나’라면 물질은 병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
또한 물질이 자유자재한 ‘나’라면 ‘나의 몸은 이렇게 되라.
나의 몸은 이렇게 되지 말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물질은 그렇지 못하다.
물질은 영원불변한 ‘나’가 아닌 까닭에 병들고,
물질은 자유자재한 ‘나’가 아닌 까닭에 ‘나의 몸은 이렇게 되라.
나의 몸은 이렇게 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물질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운 것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파괴되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그것을 두고 과연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비구들이여,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의식(識)은 ‘나’가 아니다.
만약 느낌. 생각. 의지.의식이 ‘나’라면 파괴되지 않아야 하고,
‘이렇게 되라. 이렇게 되지 말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못하질 않는가. 느낌. 생각. 의지. 의식은 영원불변한 ‘나’가 아닌 까닭에 파괴되고
‘이렇게 되라. 이렇게 되지 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 생각. 의지. 의식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느낌. 생각. 의지. 의식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즐거움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파괴되는 본성을 가진 그것을 두고 과연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꼰단냐를 비롯한 다섯 비구의 얼굴에 깨달은 이의 평온함이 넘쳐흘렀다.
부처님께서 선언하셨다.
“이제 세상에는 여래(如來). 응공(應供). 정변지(正邊知)와 더불어 여섯 사람의 아라한(阿羅漢)이 존재한다.”
부처님이 법륜을 굴리신 지 오 일째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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