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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부처님의 생애 / 제7장. 교단의 성장 (8) .. 꼬삼비의 세 정사 & 남쪽 아완띠까지

by 우수맘 2022.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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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9 - [마음공부] - 부처님의 생애 / 제7장. 교단의 성장 (7) .. 왕비 케마의 출가

 

부처님의 생애 / 제7장. 교단의 성장 (7) .. 왕비 케마의 출가

2022.10.19 - [마음공부] - 부처님의 생애 / 제7장. 교단의 성장 (6) ..숫도다나왕의 임종과 비구니 승가의 탄생 부처님의 생애 / 제7장. 교단의 성장 (6) ..숫도다나왕의 임종과 비구니 승가의 탄생 2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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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생애

 

7. 교단의 성장 (8)

 

꼬삼비의 세 정사

 

부처님의 명성을 들은 꼬삼비의 세 거상이

오백 대의 수레에 공양물을 싣고서 멀리 사왓티를 찾아왔다.

보름 동안 설법을 들으며 부처님과 비구들에게 공양을 올린 세 장자는 사왓티를 떠나며 청하였다.

 

세존이시여, 꼬삼비로 오셔서 안거하십시오.

제자들이 당신을 위해 정사를 마련하겠습니다.”

 

그 세명의 정자는 고사까, 꾹꾸따, 빠와리까였다.

꼬삼비로 돌아온 세 장자는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물 정사를 각각 하나씩 건립하였다.

고사까가 세운 정사는 고시따라마이고,

꾹꾸따가 세운 정사는 꾹꾸따라마이며,

빠와리까가 망도공산에 세원 정사는 빠와리까암바와나였다.

 

꼬삼비는 마가다국의 서쪽에 위치한 왐사의 수도였다.

기원전 8세기 웨다의 권위를 신봉하던 빠우라와제국이 대홍수로 몰락하면서

아리야인의 땅으로 불렸던 꾸루. 빤짤라. 맛차. 수라세나는 점점 세력을 잃게 되었고,

강가강 중류에 세운 국가들이 흥성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꾸루족 일파가 이주하여 새롭게 건설한 도시 꼬삼비였다.

꼬삼비는 서쪽으로 수라세나의 마두라와 야무나강으로 연결되어,

남쪽으로 아완띠의 웃제니와 육로로 연결되었으며,

동쪽으로 강가강의 뱃길을 따라 와라나시와 마가다국

그리고 앙가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한 도시국가였다.

 

또한 꼬삼비는 꾸루. 빤짤라. 맛차. 수라세나에서

쇠퇴해가던 바라문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었다.

세 장자의 귀의로 꼬삼비에 터전을 마련하게 된 부처님 교단은

바라문교의 본토 사람들에게 본격적으로 가르침을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흥종교에 배타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던 이 지역 사람들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부처님과 제자들은 갖가지 모욕과 멸시를 감수해야만 했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새롭게 귀의하는 이들에게도 남다른 신심과 의지가 요구되었다.

 

그런 척박한 토양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싹을 틔웠고, 또 고결한 꽃을 피웠다.

랏타빨라 역시 눈부신 꽃다발 가운데 한 송이였다.

랏타빨라는 꾸루의 툴라꼿티까 출신이다.

출가를 허락지 않는 부모님에게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랏타빨라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일주일 동안 땅에 누워 꼼짝하지 않는 시위를 해야만 했다.

 

그의 부모님은 결국 아들의 죽음이 두려워 출가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아들의 출가한 후에도 부처님 교단에 대한 적대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후 아라한이 된 랏타빨라는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교화하고

온갖 시련을 극복하며 꾸루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승가가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 세력가의 후원과 보호가 필요했다.

꼬삼비의 우데나왕의 호위를 이끌어내는 데 크게 공헌한 사람은 첫째 왕비 사마와띠였다.

사마와띠는 왕궁에 꽃을 나르는 시녀 쿳줏따라가 전한 부처님 말씀만 듣고 귀의하였다.

그날 이후 왕비는 자기의 시녀를 스승처럼 섬기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매일같이 전해 들었다.

왕비는 부처님을 직접 뵙고 싶었지만 질투심 강한 우데나가 허락할 리 없었다.

 

사마와띠는 궁전 담벼락에 구멍을 뚫고 지나가는 부처님을 향해 남몰래 합장해야만 했다.

이를 안 셋째 왕비 마간디야가 부처님과 사마와띠가 내통하고있다며 우데나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마간디야는 꾸루의 깜마사담마 출신 미녀였다.

그녀는 왕의 사랑을 두고 경쟁하는 사마와띠도 미웠지만

부처님과는 더욱 좋지 않은 인연이 있었다.

 

부처님께서 언젠가 깜마사담마를 방문하셨을 때,

부처님의 당당한 모습에 반한 바라문 내외가

자기의 딸을 데려와 아내로 삼아달라고 청한 적이 있었다.

부처님은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운 딸을 앞에 두고

보리수 아래에서 악마의 딸들이 유혹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아름다운 여인도 결국은 똥오줌으로 가득찬 가죽주머니에 불과하다며 거절하신 것이다.

부처님의 법문에 감복한 바라문 부부는 동생에게 딸을 맡기고 비구와 비구니가 되었다.

 

그때 부부가 동생에게 맡겼던 딸이 바로 셋째 왕비 마간디야였다.

똥오줌 가득찬 가죽주머니라는 말을 모욕으로 받아들였던 마간디야는

옛날의 상처를 잊지 않고 있었다.

마간디야의 끈질긴 음해에 성질급한 우데나는

사마와띠와 궁녀들의 죄를 추궁하고 나섰다.

시기심에 불탄 왕은 화살 끝에 독을 바르고 시위를 팽팽히 당겨 위협했지만

사마와띠와 궁녀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담장 너머 법문만으로 그들은 이미 수다원과를 성취하였던 것이다.

평온한 여인들의 모습에 더욱 화가치민 우데나는 군사들에게 활을 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원한과 증오심을 떨친 그녀들 앞에서 화살은 낙엽처럼 떨어졌다.

 

감복한 우데나는 왕비와 궁녀들에게 잘못이 없음을 알고 용서를 구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우데나는 왕비의 청에 따라

부처님과 비구들을 궁궐로 초대해 공양을 올리고 설법을 듣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쿳줏따라를 우바이 가운데 가장 박식한 사람이라 칭찬하고,

사마와띠를 우방이 가운데 가장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라며 칭찬하셨다.

 

 

남쪽 아완띠까지

 

부처님이 출현하였다는 소식은 남쪽 멀리 아완띠까지 전해졌다.

아완띠국 짠다빳조따왕은 부처님을 초청하기 위해 깟짜나와 일곱 사람을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깟짜나는 웃제니 출신으로 국사의 아들이었으며 흑인이었다.

빳조따의 요청을 전달하기 위해 사왓티를 방문한 여덟 사신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자신들의 임무를 잊어버렸다.

그들은 모두 비구가 되었다.

 

그들 가운데 깟짜나가 수행의 과위를 가장 빨리 성취하였다.

논리적 사유와 언변이 뛰어났던 깟짜나는 부처님의 간단한 설법을

자세히 분석해 설명하고 논의함에 있어 최고의 능력을 가졌다고 칭찬 받았다.

출가의 목적을 완수한 후에야 깟짜나는 부처님께 간청하였다.

 

부처님, 아완띠의 왕 짠다빳조따가 부처님을 초청하였습니다.

아완띠국을 방문해 주십시오.”

잠시 침묵하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가도 충분합니다.”

부처님의 허락을 받은 깟짜나는 고향 웃제니로 돌아와 왕의 동산에 머물렀다.

그의 귀국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완띠국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제자가 되어 출가를 원하게 되었다.

사람들을 출가시켜 구족계를 주려면 3() 7(“),

즉 최소 열 명의 비구가 필요하였다.

 

당시 변방이나 다름없던 아완띠국에서는 열 명의 비구를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출가를 원하는 이들을 다른 승가에 보내자니

가장 가까운 승가도 멀고 먼 꼬삼비국에 있었다.

비구들은 부처님이 제정한 계율을 생명처럼 여겼다.

부처님 한 분 외에는 누구도 계율을 제정할 수 없었고, 함부로 고칠 수도 없었다.

 

깟짜나는 부처님을 뵙기 위해 사왓티의 기원정사로 떠나는

제자 소나꼬띠간나에게 아완띠국의 사정을 말씀드리게 하였다.

그리고 지역의 특성을 고려해 계율의 적용을 적절히 가감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 부처님께서는 아완띠국의 사정을 고려해 32증만으로

구족계를줄 수 있도록 예외 규정을 만들었다.

또한 검고 딱딱한 아완띠의 토질을 고려해 두꺼운 신발을신도록 허락하였으며,

더위가 심한 지역임을 고려해 보름에 한 번으로 정해진 목욕을 보다 자주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양이나 염소나 사슴 등의 가죽으로 만든 이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계율의 조항이 편의에 맞춰 수정됨으로써 아완띠에새로운 승가가 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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